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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대한민국의 영토인 대마도(쓰시마 섬)를 강탈한 만행의 역사를 고발

波羅蜜多 2014. 4. 8. 09:21

★ 우리나라의 최초 대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


신라 제18대 실성 이사금 (實聖尼師今 402~417 재위기간 15년) 7년(409) 봄 2월, 왕은, 왜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고 병기와 군량을 저축하여 우리나라를 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이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그들의 군사 시설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했다.
"저는 '병기란 흉물스런 도구요, 전쟁이란 위험한 일이다'라고 들었습니다. 황차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더할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차라리 험난한 지형을 찾아 요새를 설치하였다가, 적이 올 때 이를 막아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게 유리할 때 나가서 사로잡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내가 남을 끌어당길지언정 남에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책략 중에는 상책입니다."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또한 대마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고대 신라에서 일본으로는 540년에서 929년까지 89회 입조하였고, 일본에서 신라로는 571녀부터 882년까지 45회에 걸쳐 사절(견신라사)를 파견하였는데 모두 대마를 경유했다고 적고 있다.

813년 대마(対馬)에는 신라어(新羅語)의 통역을 두었고, 894년에는 신라의 대소선100척과 약 2,500인이 좌수포(佐須浦/사스라우/현 대마시)를 습격한 사건이 있었다.

1019년 정체불명의 선박 50척이 대마를 습격했다. 기록에는 피해자가 365명이고, 납치된 자가 1,289명으로 유명한 대마은광(対馬銀鉱)도 소실되었다. 이것은 노예삼기를 목적으로 일본인을 약탈한 것이다. 피해는 대마뿐 아니고 이키(壱岐) 북구주(北九州)까지 미쳤다. 후에 이들의 정체가 도이(刀伊:여진족/女真族)족으로 판명되었다. 여진족은 이 때 대마의 판관 대장영제근(判官代長嶺諸近:長嶺 諸近 生没年不詳. 平安時代의 対馬国의 役人)과 그 일족을 포로로 하여 갔다. 제근(諸近)은 혼자 도망쳤으나 처자를 찾기 위해 고려로 다시 건너가 일본인 포로의 비참한 정황을 살피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조사내용은 조선을 1차 거쳐 대마로 건너 간 도이(여진족)족이 다시 조선으로 올 것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조선은 이들이 과연 돌아오니 일격에 격퇴하고 대마인을 구조하였다. 구조된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당시 도해가 불법이었던 일본은 제근(諸近)을 구금 형에 처했다.